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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100년의 시간을 담아낸 한 그릇 깊은 맛 ‘설렁탕’
과년한 딸이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가 방송작가를 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늙으신 부모님은 말리지 않으셨다. 머리 다 큰 동생 둘은 낡은 역사 플랫폼에서 얼마나 훌쩍였던가.
새벽녘, 무궁화호가 출발할 때 발을 동동 구르며 “언니야~ 누나야~” 부르다가 속도를 붙이는 열차를 따라 뛰었던 모습을 뒤로 하고 나는 애써 드라마 주인공이라도 된 양 입을 앙 다물고 성공을 다짐했던 기억. 필시 그랬을 것이다.
어디 나만 그랬을까? 서울역을 내리자마자 바로 마주하는 건너편 23층 높이의 거대한 빌딩.
1970~80년대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대우센터빌딩은 고도성장의 상징이자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종합상사들의 심장부였다.
허나 한 시대를 풍미한 건물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던 초대 창업주의 몰락과 더불어 소유주가 바뀌는 수난(?)을 겪었지만 획기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서울스퀘어로 재탄생한 뒤 새로운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아직도 내 입은 ‘대우빌딩’이 편하다. 휘황찬란한 신식 KTX로 무장한 신식 서울역(?)이 한반도의 대동맥 노릇을 하고 있어도, 가슴 한구석엔 옛 서울역에 대한 정취가 진하게 남은 것처럼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딱 20년 전 2004년 KTX 고속철도 개통식과 더불어 구 서울역사는 폐쇄됐다.
1900년, 경인철도의 개통과 함께 용산역과 서대문역 사이의 간이역 역할을 하는 ‘남대문정차장’이 역사(驛史)의 작은 시작이었다. 1925년, 대륙 진출의 야욕을 가진 일제, 그리고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 의해 르네상스식 건축물로 새롭게 역사를 지어 올리며 역사 이름은 경성역으로 바뀐다.
일본인 건축가 쓰까모토 야스시가 설계한 경성역은 규모도 상당했지만, 붉은 벽돌, 화강암 바닥, 인조석을 붙인 벽, 박달나무 바닥으로 이루어진 유럽식의 이국적인 외관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특히 2층의 최초의 양식당 ‘그릴’은 양식당 자체를 그릴이라고 통용할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모던보이 모던걸이 집합하던 식당을 배경으로 무용가 최승희는 광고를 찍었고, 시인 이상 역시 글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지금 이 공간의 공식 이름은 문화역서울284으로 바뀌었다.
문화 네크워크의 중심, 역(驛)이라는 상징성과 더불어 서울의 근대 유산으로 인정받으며 국가지정문화유산인 사적으로 지정돼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됐다.
2년 간의 공사 끝에 100년 전, 경성역의 모습으로 복원한 생활문화예술 플랫폼에선 계절별로 다양한 문화예술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비단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와 공존하며 미래를 항한 문화생산의 거점이 되는 공간으로 거듭난 서울역에선 언제든지 100년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단순한 공간 대여 이상으로 현대적인 작품들과 조화를 이루는 근대건물은 꽤나 인상적이다. 신청만 하면 인물, 건축 등 다양한 주제로 해설을 곁들이는 관람이 있으니 누리집을 참조하시기를.
이곳에 들어서면 서울역의 과거를 낱낱이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역사적 사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열차표가 없는 사람들도 드나들 수 있었던 휴식처 3등 칸 대합실과 달리 일본인이나 지체 높은 양반들만 출입할 수 있었던 1등 칸 대합실, “어디 남녀가 유별하거늘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있나?” 기함을 토했다는 양반네들 때문에 한동안 여인들을 따로 앉혔다는 부인 대합실도 인상적이었다.
* ‘대합실’은 일본어에서 온 말이라 ‘대기실’로 표기해야 하나, 당시 시대상을 담기 위해 ‘대합실’로 표기함
이 경성역을 거쳐 간 인물들 중 우리가 기억해야 할 몇몇 인물이 있다. 황손으로 태어나 강제로 일본 신문물과 신교육을 받아야 했던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갈 때도,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이 유럽으로 유학을 갈 때도 이 경성역을 거쳤다.
그리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과 남승룡 선수 역시도 기차로 베를린까지 갔던 행적을 짚어본다. 1936년 6월 4일 오후 3시 30분 경성역에서 대륙횡단 열차를 탄 손기정은 같은 날 오후 11시 49분, 한반도의 끝이자 손 선수의 고향인 신의주에 도착한다. 당시 신의주역에는 1000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고 하니, 그 얼마나 슈퍼스타였으리.
기차는 중국과 러시아, 폴란드 바르샤바 등을 거쳐 서울을 떠난 지 꼬박 13일 뒤, 베를린 프리드리히역에 도착한다. 그리고 익히 알다시피 세계가 보는 앞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거머쥔 손기정과 남승룡은… 차마 옷에 박힌 일장기를 지우지 못해 고개를 떨군 채 사진을 남긴다.
젊은 그들이 타고 간 대륙횡단열차는 그 어드메 있으려나. 근대는 어쩌면 우리에겐 회한 가득한 시대였으나 오늘의 근간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서울역의 상징이자 근대의 이정표가 된 역의 동그란 시계의 지름은 무려 160cm, 6·25 전쟁 당시 역무원들은 이 거대한 시계를 포화에 두고 갈 수 없어 일일이 분해해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서울 수복 뒤 재조립해서 서울역에 내걸었다고 한다. 변변한 시계 하나 없던 당시를 떠올리자면 서울역은 교통의 중심이자 산업의 중심, 그리고 삶의 중심이었다.
설과 추석이면 귀경 열차표를 구입하려던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던 곳, 그리고 고향 사람과 물자가 모이던 광장- 그야말로 사람이 득실대던 서울역 뒤로 열차가 도착하면 자연스레 장이 섰다.
노량진 수산시장과 양재동 농산물 시장이 도시계획으로 분리되기 훨씬 이전의 이야기다. 그리고 돈이 도는 서울역 근처에서 자연스레 명성을 얻게 된 음식, 바로 설렁탕이다.
원래 설렁탕은 한성 바닥에서 돈 좀 깨나 있는 양반들이나 잡숫던 음식이었으나, 일본 조미료 ‘아지노모토’가 이 땅에 상륙한 뒤로 특유의 감칠맛으로 우리 민족의 입맛을 그만 접수해 버리고 말았다.
아지노모토는 그윽하게 곤 고깃국이 아니더라도 일단 감칠맛으로 승부를 겨뤘으니, 이밥(쌀밥)에 고깃국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민족에게 손쉽게 설렁탕 국물과 냉면 육수를 대령했다.
그러나 격동의 60~70년대를 거치고 80년대 눈부신 경제성장을 등에 업으면서 우리 식탁은 고깃굿 원형을 복원하기 시작한다. 서울역 뒤편 중림장 설렁탕도 그중 하나다.
since 1972. 반세기 넘는 역사를 지닌 중림동 터줏대감 ‘중림장’의 2대 사장 김경호(65년생) 씨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 설렁탕을 팔고 있다. 서울역에 당도한 열차들이 전국에서 몰려든 물자를 한 보따리 풀면 상인들도, 손님들도 모처럼 돈이 돌았다. 해서 서울역 인근에 설렁탕 가게들이 대여섯 군데 즐비했다고 한다.
원래 시장 상인들한테 백반을 팔던 모친은 달러 빚을 내서 당시 꽤 넓은 한옥을 거금 800만 원을 주고 샀고 이 건물에서 지금껏 설렁탕을 팔고 있다.
손님이 앉자마자 따뜻한 엽차와 석박지 섞인 김치를 통으로 포기 채 한껏 내 주는 건 반세기가 넘도록 유효하다.
꼬릿꼬릿한 고기 특유의 누린내가 물씬 나는 중림장 설렁탕. 그러나 숟가락을 들어 한 입 국물을 떠 보면 깔끔하니 퍽 신기하다.
“우리집 설렁탕이 약간 냄새가 나잖아요? 어머니는 고기 핏물 빼는 것도 아까워하셨습니다. 제가 가업을 이을 때 핏물을 빼니, 그 아까운 피를 왜 버리냐고 엄청 야단치셨지요. 현대에 맞게 표 나지 않지만 조금씩 바꿔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설렁탕에 빼놓을 수 없는 된 국수사리도 생각해보면 박정희 정권 때 쌀 소비를 줄이는 절미운동의 일환으로 탄생한 것이다. 쌀밥을 낼 수 없는 수요일과 토요일, 무미일(無味日)에 맞춘 궁여지책이었던 것이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한번 길들여 지고 나면 설렁탕의 짝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아니 국수가 됐든, 시대의 음식으로 받아들인다.
나는 면 사리가 넘치도록 들어간 중림장의 설렁탕도 애정하지만, 석박지 통김치를 더욱 사랑한다. 고기 한 점에 김치 한 점, 그리고 국물 한 숟가락 곁들이면 “캬” 소리가 나온다. 소주 한 잔 아니할 수 없다.
나뿐만 아니라 이 오래된 가게 중림장의 방틀, 탁자마다 진하게 밴 누린내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마다 테이블엔 소주 한두 병이 으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김치를 만들려고 얼마나 애쓰는지 아십니까? 겨울에 적당히 쉬게 하려고 김치통을 방안에 모셔두지요. 김치가 상전이라니까요! 요새처럼 배춧값 오를 때는 적당히 타협하고 싶기도 하지만 어머니 얼굴을 생각하고 단골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지요.”
이 겨울, 그저 설렁탕 한 그릇이면 족하다. 서울역 난전을 누비던 장돌뱅이든, 한 끼 때우는 산업체 여공이든, 아니면 세계를 누비던 ‘미생’의 종합상사맨이든 저마다 고단한 상경의 꿈이 분명 지금도 서울역 도처에 흐른다.
내일은 더 좋으리라는 분명한 희망의 꿈, 소주 한 잔에 거나하게 달뜨는 꿈. 서울역을 지나 한때 뜨거웠던, 젊었던 그들과 시베리아 저 너머로 간다. 내 오늘 하루만큼은 100년 전 모던걸이 되어 이상과 나혜석을 벗하는지도 모른다.
◆ 문화역서울284
ㅇ 주소 | 04509 서울특별시 중구 통일로 1 서울역(본옥) 문화역서울284
ㅇ 안내 | Tel. 02-3407-3500
ㅇ 시간 | 11:00-19:00 (관람시간 30분 전 입장 마감 / 공간투어 프로그램은 예약시간에 따라 별도 운영)
◆ 이윤희 방송작가, 로컬문화 전문가
TV조선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 KBS ‘한식연대기’, 넷플릭스 ‘삼겹살 랩소디’, 스카이트래블 ‘한식기행 - 종부의 손맛’ 등 우리 식문화를 소재 삼아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집필했다. 방송작가 22년 차지만 언제나 현역~! 지역마다 고유한 맛과 멋을 알리는 맛깔 난 글을 쓰고 싶다.